말을 아끼는 아이가 설명을 시작할 때

말을 아끼는 아이가 설명을 시작할 때,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

말을 거의 하지 않던 아이가 자신이 잘 아는 게임과 그림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침묵을 거절로 단정하기보다 안전감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살펴봅니다.

처음 상담실에 왔을 때 아이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질문을 하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고개를 저었다.

길게 대답하는 일은 드물었다.

어떤 질문은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꺼냈다.

게임을 켰다.

몇 초 후 다시 껐다.

다른 게임을 켰다.

또 껐다.

마치 대답 대신 화면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학교 이야기를 물어도 짧았다.

친구 이야기를 물어도 짧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도 짧았다.

상담실 안에는 아이의 목소리보다 침묵이 더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 다른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게임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어떤 게임을 하는지 물었더니 설명이 시작되었다.

어떤 캐릭터가 있는지.

어떤 기술을 쓰는지.

어떤 방법으로 이길 수 있는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아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말이 끊기지 않았다.

도블을 하다가도 게임 이야기가 나왔다.

체스를 하다가도 다른 게임 이야기가 이어졌다.

로블록스 이야기.

배틀그라운드 이야기.

자신이 해본 게임 이야기.

좋아하는 세계 안에서 살아나는 설명

그림을 그릴 때도 비슷했다.

어느 날은 상담 시간이 조금 길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스케치북을 가져왔다.

상담사도 마주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가 슬쩍 그림을 보여주었다.

무엇을 그렸는지 설명했다.

상담사가 그리는 그림도 궁금해했다.

처음 상담실에 들어오기 싫다고 버티던 아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장면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하지 않는 아이

말이 없는 아이도 아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쉽게 말하지 않는 아이에 가까웠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영역 안에서는 충분히 말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게임.

잘 아는 이야기.

관심 있는 것들.

그 안에서는 자신의 생각도 말하고 설명도 했다.

하지만 낯선 질문은 어려워했다.

자신을 평가할 것 같은 질문은 조심스러워했다.

틀릴 수도 있는 대답은 쉽게 꺼내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어른들도 그렇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바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조금 더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린다.

내 말을 비웃지 않을 사람인지.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인지.

틀려도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아이도 비슷했던 것 같다.

침묵은 거절이 아니라 확인 중인 시간일 수 있다

아직 확인 중인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확인이 조금씩 끝나자 변화가 시작되었다.

게임 이야기를 했다.

그림 이야기를 했다.

학교 이야기도 조금씩 늘어났다.

상담사를 향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종종 말을 잘하는 아이를 자신감 있는 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자신감이 생긴 뒤에 말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하다고 느껴졌을 때 비로소 말을 시작한다.

상담실에서 아이가 들려준 긴 게임 이야기들도 그런 순간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게임 설명이었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들으면 이런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야.”

“이건 내가 잘 아는 거야.”

“이건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야.”

그리고 어쩌면 그 말 뒤에는 이런 마음도 숨어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조금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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