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들고 다가오는 아이

칼을 들고 다가오는 아이, 공격 뒤에 숨은 관계의 신호

말보다 칼싸움 놀이로 관계를 시작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공격적인 행동을 허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관계 신호를 담는지 살펴보는 글입니다.

상담실 문이 열리자 아이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장난감장으로 향했다.

무엇을 찾는 것처럼 이 칸 저 칸을 둘러보더니 장난감 칼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말은 없었다.

대신 칼 끝으로 내 팔을 툭 건드렸다.

“칼싸움 하자는 거야?”

묻자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은 이미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장난감장으로 가 다른 칼 하나를 꺼냈다.

그제야 아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상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무렵 아이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질문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다.

길게 대답하는 일은 드물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오면 휴대폰을 켰다.

게임을 실행했다가 금방 끄고, 또 다른 게임을 켰다가 다시 끄곤 했다.

상담실에 들어오기 싫다고 버티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칼싸움만 시작되면 아이는 달라졌다.

웃음이 늘어났다.

움직임도 많아졌다.

말도 조금씩 늘어났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반복되는 패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날은 상담실에 들어오자마자 칼을 꺼냈다.

어떤 날은 상담사를 툭툭 건드렸다.

또 어떤 날은 상담사가 칼을 들어야 비로소 만족한 듯 웃었다.

아이는 칼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칼 자체가 아니었다.

칼싸움으로 관계를 시작하는 아이

상대가 자신을 향해 반응하는 경험이었다.

상담사는 종종 아이가 휘두르는 칼에 맞아주는 역할을 했다.

지친 척도 했다.

아픈 척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더 크게 웃었다.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관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물론 놀이가 항상 부드럽지만은 않았다.

칼을 휘두르는 힘은 점점 강해지기도 했다.

상담사가 아픈 척을 해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날도 있었다.

상대가 얼마나 아픈지보다 지금 자신의 흥분이 더 중요해 보이는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아이가 보여주는 중요한 모습 중 하나였다.

가까워지고 싶지만 상대를 고려하는 법은 아직 서툴 때

어떤 아이는 먼저 친해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친해진 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른다.

상대가 불편한지, 너무 세지는 않았는지, 지금 멈춰야 하는지 읽어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아이 역시 그런 과정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칼싸움이 끝나는 방식이었다.

어떤 날은 아이가 먼저 칼을 꺼내 들고 시작했다.

그런데 끝낼 때도 아이가 먼저 끝냈다.

어느 날은 칼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다른 게임을 꺼내 왔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칼싸움은 이제 끝난 거야?”

아이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도 자신이 하고, 끝도 자신이 정하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이는 칼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계를 연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상담실에 처음 왔을 때 아이는 관계를 말로 시작하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몰랐고, 낯선 어른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칼은 달랐다.

칼을 내밀면 상대가 반응했다.

칼을 휘두르면 놀이가 시작되었다.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관계가 만들어졌다.

아이에게 칼은 공격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연결의 도구였던 셈이다.

공격적인 행동에는 한계와 이해가 함께 필요하다

때리고, 밀고, 소리 지르고, 장난감을 던지는 모습 말이다.

물론 그런 행동을 그대로 두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그 행동의 방향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를 완전히 밀어내기 위한 행동인지.

아니면 서툴지만 가까워지기 위한 행동인지.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그 안의 마음은 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가 정말 원했던 것은 싸움이 아니라,

자신이 내민 관계의 신호를 누군가 받아주는 경험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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